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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마라토너 대한민국의 '손기정'

스야니야 2021. 7. 12.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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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평생소원은 일본인이 아닌 한국인 손기정으로 기억되는 것이다

일제강점기였던 1936년 제11회 베를린올림픽대회에 참가하여 2시간 29분 19초의 세계최고기록을 세우면서 우승한 손기정 선수가 시상대에 올라 월계수 화분으로 유니폼에 있는 일장기를 가린 일은 유명합니다.

이 대회에서 3등을 한 남승룡 선수는 월계수 화분으로 일장기를 가릴 수 있었던 손기정 선수가 너무 부러웠다고 하죠.

최근 뉴스에서 일본의 올림픽 박물관의 역대 일본인 금메달리스트를 전시하는 코너에 손기정 선수가 포함돼 있어 서경덕 교수가 도쿄올림픽 조직위에 항의했다는 기사를 접할 수 있었습니다.

한국인이나 일본 강점기 시기라 일본 대표로 출전했다는 정확한 사실을 표기 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기사들을 접하니 그 당시의 손기정 선수가 얼마나 심적으로 힘들었을지가 더 와닿는 것 같아 손기정 선수에 대해서 알아보려고 합니다.


1. 그의 생애

(1) 출생: 1912년 8월 29일(음력)

(2) 출생지: 평북 신의주

(3) 학력: 메이지대학 법학부 졸업

(4) 직업: 마라토너

(5) 주요수상:

1932년 신의주 대표로 제2회 동아마라톤대회에 참가하여 2위 수상

1935년 조선체육회에서 주최한 풀코스마라톤대회 우승

전일본 마라톤선수권대회 우승

베를린올림픽대회 마라톤 금메달(1936)

(5) 은퇴 후 : 1944년 손기정은 조선저축은행 은행원으로 일했으며 일장기 말소사건 때 관계를 맺은 여운형을 도와 독립운동의 연락담당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2. 그의 어린시절

가난했던 어린시절, 16세 무렵에는 중국 단둥[丹東]의 회사에 취직한 그는 차비가 없어서 신의주∼압록강 철교∼단둥에 이르는 20여 리 길을 매일 달려서 출퇴근했다.

손기정은 소학교 6학년 때 안의전(중국 안동과 신의주 간 대항경기)에 출전하여 어른들을 제치고 5,000m에서 우승하였고 1931년 10월에는 전국체육대회(조선 신궁 대회)에 평안북도 대표로 출전하여 5,000m에서 2위를 하였다. 이듬해 1932년 동아일보 주최 하프 마라톤에서 2위를 하면서 이 인연으로 양정고보에 입학하게 된 손기정은 중단했던 학업을 계속할 기회를 얻고 본격적으로 마라톤 훈련을 받을 수 있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손기정 [孫基禎] - 1936 베를린올림픽의 마라톤 금메달리스트 (인물한국사, 김정미, 장선환)

 

3. 베를린 올림픽

대표 선발전에서 레이스 내내 일본 선수 2명이 손기정과 남승룡 선수를 따라잡지 못하자 일본 선수들은 몰래 코스를 이탈하면서 지름길로 갔고, 이를 본 손기정과 남승룡은 반드시 이기자고 다짐하면서 달렸다고 한다. 결국 2차 선발전에서도 손기정과 남승룡은 사이좋게 1, 2위를 나눠 가졌다.

이후 올림픽 본선 경기에서 '2시간 29분 19초'로 당시 올림픽 신기록을 기록하며 금메달을 획득했다. 같이 출전한 남승룡은 동메달을 획득했다.

 

손기정과 남승룡은 우울해 보였다. 스타디움에 일장기가 오르고 일본 국가 ‘기미가요’가 흘러나올 때 월계관을 쓴 손기정과 남승룡은 더욱 고개를 숙였다. 손기정은 월계수 나무로 입고 있던 옷에 새겨진 일장기를 가렸다. 손기정은 의기소침했고 슬퍼 보였다. 자신이 고통스럽게 발로 뛰어 얻은 이 영광이 조국의 것이 아니라 조국의 국권을 피탈한 일본의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손기정 [孫基禎] - 1936 베를린올림픽의 마라톤 금메달리스트 (인물한국사, 김정미, 장선환)

 

4. 일장기 말소 사건

선수를 국제대회에 내보내 놓고 언론 기자도 현지에 파견하지 못하는 식민지 언론사는 일본 신문에서 받은 사진으로 금메달 획득의 낭보를 국민들에게 알릴 수밖에 없었는데 일부 언론사는 손기정이 입은 옷의 일장기를 지우고 신문을 발간했다. 이 일로  <조선중앙일보>는 폐간하였고 <동아일보>는 무기한 정간을 당하기도 하였다.

 

5. 은퇴 이후

1944년 손기정은 조선저축은행 은행원으로 일했으며 일장기 말소사건 때 관계를 맺은 여운형을 도와 독립운동의 연락담당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해방 후 손기정은 1947년과 1950년에 마라톤 코치로 활동했으며 대한체육회 부회장, 대한육상경기연맹 부회장, 서울특별시 육상경기연맹 이사장, 서울올림픽대회 조직위원회 위원 등을 역임하였고 1988년 서울 올림픽에서는 성화 봉송자로 뛰었다.

 

당시 베를린 올림픽의 마라톤경기에는 그리스 아테네 브라드니 신문사가 우승자에게 수여하는 고대 그리스 청동투구가 부상으로 있었다. 이 투구는 손기정에게 바로 전달되지 못하고 50년간 베를린의 샤로텐부르크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가 1986년에 가서야 손기정의 손에 전달되었다. 손기정은 이를 1994년 국가에 기증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손기정 [孫基禎] - 1936 베를린올림픽의 마라톤 금메달리스트 (인물한국사, 김정미, 장선환)

 

6. 손기정의 금메달

손기정의 금메달은 현재까지도 일본이 딴 금메달로 되어 있고 올림픽 공식 기록에는 손기정의 국적 또한 일본, 이름도 손기테이로 되어 있다. 살아생전 손기정은 이것을 바로 잡기 위해 무척이나 애썼지만 일본 올림픽위원회가 손기정에 대한 국적 변경 신청을 해주지 않아 실현되지 않았다.

 

7. 88 서울 올림픽

성화봉송 주자로 선정된 손기정은 가슴에 당당하게 태극기를 달고 정말 어린아이처럼 좋아하면서 펄쩍펄쩍 뛰며 성화봉송을 했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 시절, 당당하게 태극기를 달지 못하고 일장기를 달고 나가 우승해야만 했던 손기정 선수의 마음이 어땠을지 감히 상상도 가지 않습니다.

금메달을 땄음에도 우울한 표정을 지었던 손기정 선수와 동메달을 땄던 남승룡 선수.

비록 일장기를 달고 올림픽에 나갔지만 그들은 한국인들에게 꿈과 희망 그리고 긍지를 심어주었다고 생각합니다.

 

일본인들은 역사 의식을 제대로 갖고 손기정 선수가 일장기를 달고 일본 선수단으로 출전한 건 역사적 사실이지만, 손기정은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세계에 제대로 알려주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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